
고원정 워크숍 vol. 1: 생생
고사리 X 정원연
전시 기간: 2021. 6. 16 – 6. 29
초대 일시: 없음
공-원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4길 9-3
12 - 6 pm(월요일 휴관)
기획: 최윤정(자주출판공터)
주관: 공-원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상황을 전하는 키워드, 생각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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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공방 개념의 ‘워크숍’ 개념은 동시대미술에서 ‘참여’와‘공론장’을 상징하는 과정적인 작업을 구현하는 중요한 핵심 중 하나이다. 민주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상황에 대한 일종의 공감작업으로서 워크숍을 형식으로 제안하는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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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수많은 영향관계 속에서 지친, 골골한 몸의 신호들을 직간접적으로 포착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추동시키는‘엘리먼트element’에 대한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매주 모여 음식을 나누며 수다를 떤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속 얘기까지 닿을 듯 말 듯 전달한다. 말랑해지자고 모인 자리가 다시금 부담을 지우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오해도 생기고 그 와중에 화해도 나눈다. 대화의 방식이 완전히 서로 다른 3인의 미술계 관계자가 모여있던 그 얼마간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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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뱉지 못한 말
나의 엘리멘트를 찾아서, 우리의 관계를 배려하면서, 너에게 어떻게 말을 전할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우리는 각자에게 어떤 안부를 속삭일 수 있을까.그렇게 나는 나에게.
상태를 전하는 말. ‘생생’
생생하니?
생생하자.
마음을 챙기고 이끌어주는 말
나에게 되묻고 너에게 전하는 안부
지쳐있을 우리 모두에게 생의 어느 기점에서 잠시 서로에게 기대어 가쁜 숨을 멈춰보고, 내 안의 ‘생생’에 몰입해보는 일, 마음 속에서 잔잔히 끄집어내는 심리적 과정들 속에서 추출되는 감정들이 그 ‘엘리먼트’의 하나하나를 지칭할 것이다. 개념적 형식을 ‘워크숍’으로 두고 이번 전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았다.
글/최윤정

씨 쓰기, 정원연
광목·면실·명주실·파프리카씨·도라지씨·허브씨·플라스틱 상자, 33X24X15㎝, 2021
1. 나를 비롯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자기 트라우마의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2014년부터 내 작업의 화두를 트라우마의 족보로 삼았다. 문학에서는 트라우마의 족보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자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었다. 박경리 선생님은 집필과 더불어 고추를 키우셨다. 글이 막히면 고추밭에 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김을 매셨다. 올해 초 종이에 원고지를 그렸다. 그 안에 박경리 선생님이 키우시던 고추를 그리려고 했다. 그런데 고추를 그리기엔 칸이 너무 작았다. 고추씨를 글씨 대신 네모 칸에 놓았다. 생각도 말도 안 했던 내 마음이 원고지에 놓여졌다.

2. 먹지 않는 과일과 야채의 껍질과 씨앗을 볕에 말렸다. 껍질은 부엽토가 되고 씨앗은 봄에 싹을 틔웠다. 씨쓰기에 사용한 씨도 내가 모은 파프리카 씨와 청양고추 씨 그리고 지인에게 받은 씨이다.

3. 몇 년 전부터 공간이 사람을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의 백년이 다 된 이 집을 전시공간으로 만든 문명기 작가님, 이 전시공간을 지키는 이성주씨, 고원정 전시로 모인 기획자, 고사리 작가님, 나를 이 집에 사는 영혼이 불러서 작업을 시킨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다섯명 모두 전시 전에 씨 쓰기를 했다. 그리고 씨는 전시 시작에 맞추어 싹이 되었다.


4. 처음엔 깊은 속 마음을 내어놓는 체험을 전시에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그런데 원고지 천 만들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원고지 칸은 내가 손으로 만 땀 정도 수를 놓았다. 여기서 자란 싹은 전시 후 땅에 옮겨 심을 예정이다.
글/정원연


고사리, 캔버스에 유채, 가변크기, 2020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매 순간 숨을 쉬고, 허기져 밥을 먹고, 무거운 눈꺼풀에 잠을 청하며, 간간이 배출하기를 반복하는 생의 과정들은 항상 찰나와 영원을 동시에 가지고서 내 몸에 찰싹 붙어있다. 이렇게 들러붙어 내려앉은 생의 연민과 같은 어느 그 시절의 살아있음에 다가가 보려 한다.

고사리, 캔버스에 유채, 가변크기, 2020

1998, 고사리, 사진, 가변크기, 1998
2014, 고사리, 영상, 가변크기, 2014
1. 1998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어느 날 우리 집은 최신형 자동 필름 카메라를 구매했다. 그 당신 건축 일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주로 쓰실 요량이었지만 진짜 목적은 본인 등산 다니시는 데 매진하시려고 사들이신 것 같다. 지금도 넘쳐나는 등산 사진들이 우리 집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시초가 될 즈음이었다. 신통방통한 작고 아담한 이 물건이 너무 좋았던지 매일 뚫어지라고 구경하던 모습에 아버지는 내게 필름 한 통을 넣어주시고는 하루 간 빌려주셨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룰루랄라 등교를 했다. 신이 나서 카메라를 들고 학교를 향하던 건 기억이 나는데 사실 뭘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사진만 남아 있는 그때의 나의 시선은 지금과 그리 변한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1998, 고사리, 사진, 가변크기, 1998
2. 2014년 아일랜드 체류 시절
고달픔에 떠난 여행길은 돌고 돌아 아일랜드의 한 해안에 당도했다. 긴 썰물에 쓸려나간 바다는 저 멀리 잡히지 않을 곳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아무도 없는 해안에 서 덩그러니 세찬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드럼통 하나를 발견하곤 한참을 걸어 안을 들여다보니, 과자봉지와 쓰레기들이 하염없이 그 안을 맴돌고 있었다. 아주 먼 바다 어느 곳에 있건 누구와 무엇을 하건 생의 현실은 언제나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알려 주는 듯했다.

2014, 고사리, 영상, 가변크기, 2014
3. 2010년 졸업 후 무소속 시절
길을 걷다 우연히 그림 두 점을 만났다. 한 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신채림이라는 이름도 적혀 있었고, 사진을 붙였다 떼어낸 궁금한 빈칸과 고생대를 생각하며 그려낸 멋진 풍경도 담겨 있었다. 한 아이의 세계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벅찬 감정에 얼른 집에 주워와 너무나 아름다운 그 세계를 행복한 마음으로 따라 그려보았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아름다운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더 믿고 싶었던 듯하다. 채림이에게 "난 29살 고사리야."라며, 아름다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아이였고, 한 사람이라고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두 세계가 인사를 나눈다. "안녕."
글/고사리